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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시대별 서양 미술

[서양미술사] 스페인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 엘 그레코(El Greco) / 「삼위일체」

by 루피누나 2024. 4. 2.

 

 이번 포스팅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스페인에서는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그 시기 회화와 화가들을 소개하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스페인 르네상스의 시작은 역사적으로 가톨릭 군주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은 왕국을 통합하면서 기존에 미약하던 왕권을 중세 봉건주의로 굳건하게 갖추었는데, 이로 인해 귀족들보다 월등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를 토대로 가톨릭 군주들은 귀족 세력을 왕실의 휘하에 있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확대해 갑니다. 동시에 세력이 약화된 그라나다 왕국의 순수 이베리아 스타일을 간직한 문학적 요소가 가미되지 시작하였고,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많은 예술가들의 영향 아래 여러 요소가 합쳐진 그들만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됩니다.

 

스페인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

 1472년 스페인 발렌시아에 이탈리아의 화가 파올로 데 산 레오카디오가 도착한 이후, 1492년과 1503년 사이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될 추기경, 로드리고 데 보르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1400년대를 시작으로 스페인에 성숙한 르네상스 예술이 확산된 것은 이 화가 덕분입니다. 그리하여 발렌시아 지방은 스페인에서 가장 순수한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움직임이 카스티야 지방에 도달한 시기는 이로부터 10년 후입니다. 

 사실 여러 요소들이 혼재된 개성적인 스페인 회화에서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콕 집어 구분해 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적 요소는 많은 경우 아주 표면적이었고, 그 영향이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북유럽의 영향과 혼합되고, 기존의 스페인 화풍과도 섞였습니다. 스페인의 여러 지방에서 이탈리아의 화풍에 얼마나 접근하고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었는지, 또한 르네상스 화풍을 고스란히 따랐는지 다른 기존의 화풍과 접합을 했는지,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잠시 여러 화파가 나타났습니다.

 스페인 초기 르네상스 화가 중 중요한 두 인물은 페드로 베루게테와 후안 데 플란데스입니다. 페드로 베루게테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했으며 그곳에서 고전적 모델을 학습했고 1480년대 초에 스페인으로 귀국한 그는 고전적 장식 요소와 엄격한 형태 감각, 그리고 절묘한 인체 표현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산 레오카디오와는 달리 그의 작품은 개인적 취향과 그림을 주문한 이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식과 이전의 카스티야 화충을 절충한 형태였습니다. 이는 스페인식 플랑드르, 고딕, 그리고 이슬람적 요소가 결합된 무데하르 양식까지 두루 포함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카스티야에 르네상스를 소개한 다른 중요한 인물은 후안 데 플란데스입니다. 플랑드르 출신인 그는 1496년 카스티야 왕국의 북쪽 지역에 가톨릭 여왕 이사벨의 밑에서 일하기 위해 도착합니다. 그의 스타일은 한스 멤링, 양 반 에이크의 화풍인 브루게 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화된 아름다움의 추구, 섬세한 명암의 사용, 이탈리아 건축과 장식 요소를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조금씩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1504년 서거하자 플란데스는 카스티야에 머물기로 결정하면서 그의 스타일을 새로운 주문에 맞춰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스페인 매너리즘과 엘 그레코

 매너리즘에 대해 말하자면, 스페인에 존재하는 모든 르네상스 미술은 사실상 대부분이 매너리즘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가 스페인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배경으로 인해 스페인에 도착한 화풍은 사실상 르네상스의 절정기 화풍보다 매너리즘 시기의 화풍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스페인의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을 특징짓는 인물은 엘 그레코가 될 것입니다.

 엘 그레코는 1541년 그리스의 크레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입니다. 이후 스페인에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불리게 됩니다. 크레타에서 비잔틴 양식을 익혀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한 엘 그레코는 이 과정에서 원하던 대로 서양 화법을 완벽하게 터득하였지만 로마에서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스페인의 궁정 화가가 될 야심을 품고 스페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톨레도로 향하여 그의 독특한 개성이 넘치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됩니다.

 엘 그레코에 대한 후대의 평은 아주 다양합니다. 티치아노의 제자이며 괴팍한 그리스의 화가라는 평, 작품을 통해 펠리페 2세 시대 스페인 사회의 가치관과 신앙심을 가장 잘 반영한 사람이라는 평, 혹은 그가 지적이고 철학적인 화가여서 자유분방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스페인풍보다는 매너리즘 형식에 더 가까운 특별한 화풍을 가진 화가라는 평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엘그레코
El Greco, 「삼위일체」, 1577-79년,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톨레도에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수도원의 미사실에 있는 중앙 제단화였습니다. 이 수도원의 세 제단화와 대성당의 「엘 엑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을 벗김)」는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처음으로 주문받아 제작한 그림들입니다. 이 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궁정에서 친구로 지내던 루이스 데 카스티야의 아버지가 이 성당에서 일하던 덕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갓 도착했던 엘 그레코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뒤러의 판화에서 그 구성을 참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부분은 삭제함으로써 「피에타」같이 고통의 중요성보다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따뜻하고 절실한 감정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색상은 베네치아풍이었으나 우락부락한 근육과 장엄한 그리스도의 표현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아름다운 몸과 다정다감한 얼굴 표정은 전체 그림의 느낌을 잔잔하게 만들며 스페인의 매너리즘을 이끈 엘 그레코만의 화풍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